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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여행

[스크랩] 경주 양동민속마을

by 풍뢰(류재열) 2007. 7. 7.
여행지
경주양동마을
여행기간
3,30일,   오후 3시경에 잠시 다녀옴
비용
없음
나의 평가
아주 좋아요!아주 좋아요!아주 좋아요!아주 좋아요!아주 좋아요!
나의 여행 스토리

금요일 오후는 조금  시간적 여유가 있는지라

오랜만에 인근에 있는 양동마을을  찾았다.

3시넘어서 갔으니 해가 금방 떨어져 버렸다

안그래도 날씨가 우중충한지라  사진은 영`~그렇다.

 

 

 

 

그래도 가까운 곳에 양동마을이 있는지라 , 쉽게 갈 수가 있어서

곧잘 들리곤 하는 곳이다

지금 양동마을은  전체가 마을정리가 한창이었다

초입부터 도로가 파헤쳐져 있고, 집집마다 울타리며 지붕공사며  집 외벽도 황토인가로

전부 한공장 제품처럼  똑같이 칠해 놓은터라 이상하기도 했다

나름대로 특색을 살려  개성있게 표현해도 좋으련만..~

  

  

월성 양동 마을은 경상북도 경주군 , 강동면, 양동리 에 있는 지정민속마을이며 ,

하회마을과 더불어 양반들의 생활상과 주거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민속마을 이다 .

그러나 하회마을과는 여러가지 면에서 대조적이다.

 

하회마을은 강물이 마을을 휘돌아가는 마을이라면, 양동마을은 산을 의지하는 마을이다.

그리고 하회마을은 풍산 류씨의 단일 동성부락이지만, 양동마을은 여주 이씨와 월성 손씨의 두 씨족이 있는 집성촌 이다 . 하회에는 동제의 일부로 별신굿이 전해지지만 , 양동에는 이렇다할 동제가 없고 2∼3년에 한 번씩 정월 보름이나 추석 전후에 줄다리기하는 세시행사 정도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양동마을은 두 씨족의 집성촌인데,  조선시대 초기에 입향(入鄕)하여 지금까지 세거(世居)하여온 여주 이씨와 월성 손씨 양대 문벌을 이루며 그들의 동족집단 마을로 계승하여왔다. 두 집안에서는 각각 걸출한 인물을 배출했는데,

이씨 집안에서는 동국 18현의 한 분이시고 좌찬성(종1품)까지 오른 회재 이언적 선생를 배출 했고,   손씨 집안에서는 벼슬이 정 2품 우참찬에 까지 이른 우재 손중도 선생이다.

손씨 집안에서는 이언적이 10세 때 손중도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하여, "우재의 학문이

회재에게 전수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씨 집안에서는 이를 부정하면서 두 가문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고 한다.

양동마을의 형태를 보면 '勿'자형의 생김새를 가지고 있다. 설창산에서 내려오는

능선과 골짜기의 형태가 한자의 물(勿)자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마을의 안쪽 골에는 손씨와 이씨의 대종가인 서백당과 무첨당이 위치 하고 있으며 ,

바깥쪽 골에는 손씨와 이씨의 파종가인 관가정과 향단 이 위치한다 .  이 마을의 가옥들의 형태는 'ㅁ'자 형태이고 가옥의 위치를 보면 골짜기를 따라 가옥이 위에서 아래로 위치하는데 가장 위쪽에는 대종가 또는 파종가가 자리잡고 있으며 아래로 그 자손들이 자리하고 있으며 가옥의 규모는 내려올수록 작으며, 맨 아래에는 외거노비가 살던 '가랍집'이라고 하는 집이 있다. 이것은 당시 문중내의 위계를 반영한 것이며 유교적인 신분질서가 공간적으로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양동마을도 현대로 접어들면서 600∼700채가 되었던 마을이 151가구 295채로 줄어 들었고 , 한국전쟁을 계기로 100여 가구가 한꺼번에 줄어들었으며 공업화와 근대화로 그 수가 감소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하회마을과 더불어 규모와 질에 있어서 이처럼 우리의 전통가옥이 많이

밀집되어 있는 곳은 없을 것 이다 .

 

 

 

차에서 내리자마자 이향정으로 향하는데

지금껏  보지못했던 현호색 야생화 군락지를 발견하는 행운도 있었다.

야생화를 보면  신이나고 그렇게 좋을수가 없다..흐흐~~

그리고 기상이변으로 죽어버린  자목련이 마을중앙 모 식당마당가에  아주 화사하게 피어

오가는 사람들을 반겨주는듯  하다.

 

양동마을은 양천리에서 서기 1864년에 양천과 양동으로 갈라진 마을로서 양천마을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서 양동이라 이름 지어졌다 한다.
이 근거는 경상도 속찬지리지(慶尙道 續撰地理誌) 울주군현에 기록되어 있음을 알수 있다.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이를합하여 양동의 「東」과 양천의 「川」을 서로 따서 동천리라 하였다. 동천리에는 양동과 양천의 행정마을이 있다.양동마을에 맨 처음 사람이 살았다는 연대는 아득한 옛날 청동기시대라 한다. 근거는 서기 1984년 회야 정수장 건립부지 정지작업 때에 지금의 회야 정수장 북쪽 속칭 구불제(산 38번지)에서 출토된 기(古器)를 부산대학 박물관에 의해 연구 발표된 문헌(별지 양동 고분군 참조)의 기록이다. 이 문헌을 고분군 연구발표 라고 보고 우리들 조상님께서 이 땅에 처음 정착 하였다는 확실한 연대는 자세히 몰라도 아마 서기1600년대라고 짐작된다. 그 근거는 양천이란 마을 지명이 붙여진 연대가 이조 예종때라
고 볼때 양천 경주 이씨 입향조의 5세손이 양동 경주이씨 파조(派組) 이다. 그 후예 15세손이 30세가 넘었으니 서기 1600년대초라고 생각된다. 이것은 확실한 기록문헌이 없기 때문에 짐작 추리한 것으로 보면 된다.

 

 

 

 

 (((이향정 )))

 

1979년 1월 23일 중요민속자료 제79호로 지정되었다. 월성 양동마을 (중요민속자료 189)에 있다. 1695년(숙종 21)에 건립한 주택으로 온양군수를 지낸 이향정( ) 이범중과 그의 맏아들 이헌유가 살던 집이다.

양동마을의 안골로 들어가는 동구 초입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ㄱ자형 안채와 자형 사랑채·아래채·곳간채로 이루어져 전체 구조는 튼자형으로 배치된 집이다. 토담으로 된 담장을 들어서면 사랑채 동단에 있는 중문이 마주 보인다.

안채는 북측 꺾임부에 부엌을 두고 남측으로 안방 2칸, 건넌방 1칸을 두어 정면이 6칸이며, 안방에서 건넌방까지 툇마루를 두었다. 부엌의 서측 아래쪽에는 2칸의 광과 1칸짜리 방을 들였다. 사랑채는 정면 6칸, 측면 1.5칸으로 중앙에 2칸의 대청을 두고 대청 좌우로 방을 두었는데, 사랑건넌방의 전면과 측면 마루는 퇴를 달아 확장하고 끝에는 아()자형 난간을 돌려 누마루 같은 정취를 보인다. 아래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으로 좌우에 2칸의 광을 두고 중앙 2칸은 흙바닥 헛간을 이루고 있다.

건물구조를 보면, 안채는 막돌흩은층쌓기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웠다. 도리는 납도리이고, 가구( )는 3량가로서 내고주 없이
대들보 를 직접 전후 평주에 걸었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지붕은 맞배지붕인데, 꺾임부에서 용마루 높이의 차이만큼 합각이 구성되는 가적지붕형식의 맞배지붕 이다.

사랑채는 나지막한 막돌흩은층쌓기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방주를 세워 납도리를 받고 있다. 기둥머리에서 단부가 부드러운 첨차를 내보내 이 위에 소로를 두고 장여를 받아 납도리를 받치고 있는데, 납도리와 창방 사이에는 소로가 보이지 않는다. 처마는 홑처마이며 지붕은 한식기와를 얹은 맞배지붕이다. 여강이씨( )의 후손 이진원이 소유·관리하고 있다.

 

 

 

 

((심수정 ))

 

 

이 정자는 朝鮮(조선) 明宗(명종) 15년(1560)경에 初創(초창)되었는데 哲宗(철종)때에 火災(화재)를 입어 1917년경에 重建(중건)하였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여러 정자가 있는데 그 중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 香壇(향단)과 관련된 정자이다. 7칸 大廳(대청)의 동쪽과 서쪽으로 각각 온돌방을 두었고, 서쪽방 옆으로는 鷄子脚(계자각) 欄干(난간)이 있는 樓(누)마루를 두어 香壇(향단)이 있는 北村一帶(북촌일대)를 眺望(조망)하기 좋게 配置(배치)하였다.
큰 규모의 정자로서 필요한 칸수와 機能按配(기능안배)를 고루 배려한 것으로 보이며, 전체적으로 잘 짜여진 構造(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 정자에 부속된 행랑채는 古格(고격)있는 소규모의 가옥으로 건실하게 구성되었다.

 


* 연혁(유래)
이 정자는 농재(聾齋) 이언괄(李彦适)을 추모하여 조선 명종(明宗) 15년(1560)경에 지어졌다. 농재는 형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을 대신하여 벼슬을 마다하고 나이든 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다. 그 뒤 철종(哲宗) 때에 이 정자가 불타고 1917년경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양동마을에 여러 정자가 있지만 규모가 가장 크며, 건너편의 향단(香壇)과 관련된 것이다.
7칸 대청으로 동쪽과 서쪽에 각각 온돌방을 둔 팔작집이다. 서쪽 방 옆으로는 난간이 있는 누마루를 두어 향단이 있는 북촌 일대를 바라보기 좋게 하였다. 누마루 아래의 기둥은 팔각으로 하였다. 큰 규모의 정자로 필요한 칸 수와 기능을 고루 배려하여 잘 짜여진 구조이다. 이 정자에 딸린 행랑채는 격식 있는 소규모의 가옥으로 건실하게 구성되었다.

 

너무 늦은 시각에 갔는지라 금새 해는 떨어졌고 어두컴컴...

사진은  더이상 나오지도 않았고 더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내친김에  마을끝까지 올라가 보기로 하고 좁고 파헤쳐진 마을길을 따라

올라가니 철조망으로 둘러쳐진 아주 커다란 저수지가 나온다 .

아마도 상수도 보호지역인가 싶다.

개나리가 그 좁은 산길을 아주 화사하게 수놓고 있었고 잠시 내려 사진 몇 장 찍으려하니

어두운지라 사진이 안나온다..티덜 티덜~~

뭐 눈엔 뭐밖에 안보인다더니 둘러보니 싱싱하게 자란 쑥이 천지다.

가는길에  교차하기 힘든 산길에 내려오는 차 2대를 만나 아주 혼이 났다

터덜거리던 고물차를 얼마전에 새차로 바꾼탓도 있었다.

겨우 겨우 서로 교차하고 들어간곳에 정말  멋진 장소가 나왔다

벚꽃과개나리가 만발하고 저수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 이다.

오호``

여기 괜찮군...

다시 앞으로 나아가려니  길이 너무 좁아 그리고어디로 나올지 막막하여

도로 양동마을로 내려와 버렸다

이미  주변은 어둑어둑한 시각 아마도 7시 반 쯤은 되었으리라..

서둘러 집에 돌아와 놓고 사진정리 하면서 생각해 보니 무첨당, 관가정, 서백당, 향단등

지방의 보물들로 지정된 중요한 건물들이 참 많았던거 같은데 일일이 둘러보지 못한점이 많이 아쉬웠다. 다음에 기회를 봐서 다시 다녀올 생각이다.

 

   

 
출처 : 비바리의 숨비소리
글쓴이 : 비바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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