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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사회

[스크랩] 겸재 한양진경(펌)

by 풍뢰(류재열) 2007. 6. 29.

서울은 풍수지리학에서 말하는 명당의 조건을 거의 완벽하게 갖춘 천하으뜸의 명당이다.

삼각산이 조산이고, 백악산이 현무가 되며, 낙산이 청룡, 인왕산이 백호, 남산이 주작이 되어 거대한 비단 주머니꼴을 하고 있다. 거기에 동쪽의 안암산, 서쪽의 안산, 남쪽의 관악산이 한겹 둘러싸서 겹주머니 형태를 하고 있으니 천연의 요새라 할 만하다.

물길은 한반도에서 제일 큰 강인 한강이 동북쪽에서 흘러와 서울의 남쪽을 휘감아 돌며 서북쪽으로 흘러 바다에 이른다. 천연의 해자가 동, 남, 서를 에워 싼 형국이다.

이런 지리적 요건을 갖추기도 쉽지 않은데, 삼각산으로 내려 온 산맥 전체가 백색 화강암으로 백운산, 인왕산, 낙산이 모두 한 덩이 거대한 흰 빛 바위인듯 솟구쳐 있다. 그러니 그 사이 사이에 펼쳐진 계곡은 기임절벽과 맑고 깨끗한 물 그리고 솔숲 등 수목이 어우러지면서 그 아름다움을 절정으로 끌어올린다. 뿐만 아니라 이런 산줄기와 시냇물들이 3면을 휘감아 나가는 한강과 마주치면서 갖가지 낭떠러지와 산등성이, 모래벌판, 모래섬 등을 만들어 냈다. 이에 한양 서울의 강산풍경은 천하 제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겸재 정선은 자신이 나고 자라 평생을 살던 터전인 백악산과 인왕산 일대를 중심으로 한양 서울 곳곳을 문화유적과 함께 진경으로 사생해 남겨 놓았다. 뿐만 아니라 서울을 3면으로 둘러싸면서 산과 시내를 만나 절경을 이루고 수많은 문화유적을 담아 낸 한강변의 명승지도 양수리 부근에서부터 행주에 이르기까지 배를 타고 오르내리면서 진경산수화로 사생해 남겼다.

-최완수/겸재의 한양진경 중에서



▲ 仁谷幽居. 현재의 종로구 옥인동 부근. 정선이 살던 집을 그린 것.



▲ 仁谷精舍. 인왕산 아래 있던 겸재 정선의 집.



▲ 仁王霽色. 국보 216호. 비 오고 나서 구름이 걷히기 사작할 무렵의 인왕산.



▲ 三勝亭.춘재 이중희의 정자. 지금의 사직동 언저리.



▲ 聽松堂. 조선 중기의 큰 선비 청송 성수침의 독서당.



▲ 紫霞洞. 지금의 종로구 청운동 부근.



▲ 彰義門.



▲ 楓溪遺宅. 현재의 북악산 아래 유란동 부근. 겸재 정선의 외가.



▲ 淸風溪 1. 인왕산 동쪽 기슭. 현재의 종로구 청운동 52번지 일대. 병자호란 때 순국한 우의정 선원 김상용의 별장.



▲ 淸風溪 2.



▲ 石室書院. 지금의 경기도 미금시 수석동 부근. 김상헌의 묘소가 있던 곳.



▲ 廣津. 현재의 광진구 광장동 아차산 일대를 그린 것. 워커힐 호텔이 있는 꼿.



▲ 鴨鷗亭. 세조 때의 공신 한명회의 별장. 현재 강남구 압구정동.



▲ 楊花津. 지금의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



▲ 二水亭. 지금의 강서구 염창동 도당산 꼭대기에 있던 정자.



▲ 逍遙亭. 지금의 양천구 가양동 부근.



▲ 小岳樓. 지금 강서구 가양동 성산 기슭에 있던 누각.



▲ 歸來亭. 죽소 김광욱이 행주 덕양산 기슭에 지은 정자.



▲ 樂健亭. 지금의 행주대교 부근 고양시 덕양구 덕양산 자락에 있던 정자.



▲ 開花寺. 지금의 강서구 개화동 개화산 약사사.



▲ 銅雀津. 지금 동작대교가 있는 동작나루를 그린 것.



▲ 자하동

자하동은 지금의 서울 종로구 청운동 창의문 아래 북악산 기슭을 일컫던 동네 이름이다. 한자로는 ‘붉은 노을 속에 잠긴 마을’이라는 환상적인 뜻이지만 사실은 순우리말 ‘잣동’을 한자음으로 표기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본래 산이 많은 까닭에 예로부터 도읍을 산악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에 건립해 왔다. 따라서 자연히 성곽은 산등성이를 따라 쌓게 되니, 산마루를 뜻하는 ‘자’ 또는 ‘재’가 그대로 성의 의미로 쓰이게 됐다. 이에 산마루 위로 나있는 성문은 당연히 ‘잣문’으로, 그 아랫마을은 ‘잣동’ 또는 ‘잣골’로 불렀다.
그래서 고려 왕도인 개성의 북성문(北城門) 아래에도 자하동이 있고, 조선왕조의 도읍지인 한양 서울의 서북문 아래에도 자하동이 있다.

‘잣동’을 꼭 자하동이라 표기한 것만은 아니다. 백동(栢洞) 또는 백자동(栢子洞), 척동(尺洞) 등으로 쓰기도 했다. 모두 ‘잣’ 또는 ‘자’라는 우리말 훈(訓)을 가진 한자들이다. 동소문인 혜화동 아랫동네를 백동이나 백자동으로 표기한 것은 그 대표적인 예다.

따라서 자하동은 ‘자문’이란 순우리말로 불리던 자하문, 즉 창의문 바로 아래에 있던 동네라 해야 하겠다.

그림으로 봐도 북악산 동편 북쪽 끝자락이 내려와 마을 뒷산을 이루고 있다. 당연히 북악산과 인왕산쪽에서 흘러오는 시냇물이 이 마을을 앞뒤로 휘감아 돌아나갔을 터인데 남쪽으로 장동(壯洞) 골짜기가 시원하게 툭 터져나가 한강까지 한눈에 잡히게 되니 서울 도성 안에서 이만한 명당자리는 다시없을 듯하다.

그래서 풍류를 아는 어떤 거부가 이곳에 으리으리한 대저택을 짓고 살았던 모양이다. 겸재 시대에 이곳에 이렇게 운치 있는 대저택을 짓고 살 만한 사람은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1653∼1722) 문하에서 겸재와 동문수학했던 모주 김시보(茅洲 金時保·1658∼1734)밖에 없다.

김시보는 선원 김상용(仙源 金尙容·1561∼1637)의 고손자로 충청도 홍주의 갈산과 모도(茅島) 일대에 많은 장토(庄土·전장과 토지)를 갖고 있던 거부인데 진경시(詩)의 대가로 인정받던 풍류객이다.

선원 고택인 청풍계의 주인이기도 한 그였지만 청풍계를 종손에게 넘겨주고 그는 이보다 더 운치 있는 이런 생활공간을 따로 마련해 살았던가 보다. 이 집은 그의 7대손인 동농 김가진(東農 金嘉鎭·1846∼1922)까지 전해지는데 동농이 망국기에 농상공부 대신 등을 지내다 나라가 망한 뒤 복국(復國·나라를 회복함) 운동에 뛰어들면서 이 집은 남의 손에 넘어가 백운장(白雲莊)이라는 요릿집이 되고 말았다.

영조 27년(1751) 종이에 엷게 채색한 29.3×33.5㎝ 크기의 그림으로 간송미술관 소장.



▲ 선유봉

지금 서울 영등포구 양화동 양화선착장 일대의 260년 전 모습이다. 이 곳에는 선유봉(仙遊峯)이라는 매혹적인 산이 있었다. 신선이 놀던 산이라는 뜻이다.

출처 : 여행, 바람처럼 흐르다
글쓴이 : 무심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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