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에 있는 금강산 화암사
화암사 대웅전
화암사 일주문
강원도 속초시를 가기위해서는 설악산 한계령이나 미시령 또는 맨 위쪽 북쪽편에 있는
고성을 경유하는 진부령을 넘어가야 한다.
(대관령을 넘어 강릉을 경유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
이중에 최근 터널이 개통되어 속초를 거의 30분 내지는 한시간 가까이나 단축시킨 미시령
터널이 있는데, 이 미시령터널을 지나자마자 왼편에는 아담하고 아름답기까지한 사찰이
하나 있다.
바로 화암사인데, 눈길을 끄는 것은 금강산 화암사라 칭하기에 이곳 속초에서 금강산까지는
꽤나 멀리 떨어져 있는데 하는 의구심에서 부터 출발한다.
마침 얼마전 이곳을 지날일이 생겨 들렀는데, 가는날이 장날이라 했던가......
비가 억수같이 퍼부어 제대로 돌아보기가 어려웠는데, 그럼에도 주변 정경은 가히 일품이라
멋진 그리고 아름다운 사찰 한곳을 들를수 있어 마음은 풍요롭기까지 하다
화암사의 이야기를 옮겨보자
화암사가 '금강산 화암사'로 표기되는 것은 화암사가 금강산의 남쪽 줄기에 닿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
남쪽에서 보면 화암사는 금강산이 시작되는 신선봉 바로 아래에 세워져 있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
화암사의 기록을 전하는 사적기에도 화암사는 어김없이 '금강산 화암사'로 표기되어 있다. 이러한 지리적 환경과 역사적 기록으로 볼 때 화암사는 우리 민족의 통일기도 도량이다.
화암사가 창건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천 2백여년 전인 769년(신라 혜공왕 5), 우리나라에 참회 불교를 정착시킨 법상종의 개조 진표율사에 의해서이다. 진표율사는 금강산의 동쪽에 발연사를, 서쪽에는 장안사를, 그리고 남쪽에 화암사를 창건해 금강산을 중심으로 불국토를 장엄하고자 했다.
'금강산 화암사' 라는 명칭도 이 창건기록에서부터 출발한다. 진표율사는 이곳에서 수많은 대중에게 '화엄경'을 설했는데, 이를 배운 제자 1백명중 31명이 어느 날 하늘로 올라가고 나머지 69명도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얻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때 사찰 이름은 화엄사(華嚴寺)였다. 진표율사가 '화엄경'을 설하여 많은 중생을 제도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또한 진표율사는 이곳에서 지장보살의 현신을 친견하고 그 자리에 지장암을 창건, 화엄사의 부속암자로 삼았다. 이때 이후 화암사는 지장기도 도량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지금도 지장보살의 가피를 원하는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화엄사(華嚴寺)라는 절 이름이 공식적으로 화암사(禾巖寺)로 바뀐 때는 1912년 31 본산 체제로 접어들면서이다. 건봉사의 말사가 되면서 이전부터 사용되어온 화암사란 명칭을 공식으로 쓰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절 이름이 화암사로 바뀌게 된 것과 관련된 전설도 전해진다. 화암사 남쪽 3백미터 지점에 우뚝 솟은 왕관모양의 바위는 모양이 워낙 빼어나 빼어날 수(秀)자를 써서 수암(秀巖)이라 불린다. 진표율사를 비롯한 역대 고승들이 이 바위 위에서 좌선수도 했다고 전해지며 지금도 스님, 신도들이 찾는 기도처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화암사는 민가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스님들이 시주를 구하기가 힘들었다. 어느 날 이 절에서 수행에 전념하고 있던 두 스님의 꿈에 백발노인이 동시에 나타났다. 백발노인은 수바위에 있는 조그만 구멍을 알려주면서 끼니 때마다 그 구멍에 지팡이를 대고 세 번을 흔들라고 했더니 두 사람 분의 쌀이 쏟아져 나왔다.
그 뒤 두 스님은 식량 걱정 없이 수행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런데 몇 년 후 한 객승이 이 이야기를 듣고 욕심을 내어 쌀구멍에 지팡이를 대고 수없이 흔드는 바람에 쌀보시는 끊어졌다. 화암사가 벼 화(禾)자에 바위 암(巖)자를 쓰게 된 것도 이 전설에 연유한다는 이야기이다. 수바위는 아들을 점지 해 주는 곳으로 알려져 있어 신혼부부들의 중요한 참배 처이기도 하다.
화암사는 진표율사 이래로 여러 번 중창을 거듭하였다. 특히 1794년(정조 18년)에 이루어진 중창은 화암사의 사격을 증명해주는 큰 불사였다. 이 불사는 도한스님의 기도에 의해 이루어졌다. 도한 스님은 이때 약사전에서 나라를 위한 기도를 주야 3 . 7일 동안 올렸는데 기도가 끝나자 방광이 뻗쳐 그 빛이 궁궐의 뜰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이에 정조임금은 제조 상궁 최씨를 이절에 파견하여 도한 스님을 궁궐로 데려오도록 하였다. 스님으로부터 경위를 들은 정조는 크게 감격하여 화암사를 가순궁(嘉順宮)의 원당으로 삼고 요사채를 크게 지어주었다. 그리고 2년 뒤에는 미타암의 화응전을 정조의 원당으로 정하여 관음보살상과 정조의 친필병풍 8폭 등을 하사하고 사방금표를 정해주었다. 이처럼 화암사는 한때 왕의 원당으로 지정될 만큼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 거듭된 화마와 수마, 그리고 6.25 동란으로 사찰은 파손되어 겨우 명맥만 유지되어 오다가 90년대 들어서 오늘날의 규모로 중창이 되었다. 현재는 대웅전, 명부전, 인법당, 금강루, 일주문, 미타암, 요사채, 선원, 비림(부도군) 등을 두루 갖추어 대찰로서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신평벌을 한눈에 내려다보는 큰 일주문 옆에는 춘담대법사탑을 비롯, 화곡, 영담, 원봉, 청암스님 등의 부도 15기가 모셔져 있고 한참을 걸어 닿은 금강교는 세 개의 홍예가 떠받히며 수려한 화암사의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전통찻집인 란야원 옆으로 보이는 수바위 -
많은 전설이 서려 있다
선방과 명부전
범종루
많은 전설을 간직한 수바위
입구에 있는 전통찻집 - 란야원
"금강산 자락에 자리잡은 전통찻집에서 차 한잔에 여유를 느껴 보세요.
찻집안에서 내다 보이는 수 바위의 모습은 한폭의 그림 같답니다.
멀리 보이는 영랑호와 속초 앞 바다의 모습 또한 놓치지 말고 담아 가세요"
라는 소갯말이 매우 잘어울리는 듯 찻집에서 바라보는 정경은 가히 일품이다
< 수바위에 대한 또다른 글하나 >
풍수음양오행설에 의하면 수극화(水克火)로 물은 불을 이긴다하여 물 수(水)자를 써야겠는데 수(水)자를 쓰자하니 절이름에 대한 역사적의의가 없어진다해서 수(水)대신 수(穗)자를 쓰면 음(音)은 수(水)와 같고 뜻은 화(禾)와 같으니 수암(穗岩)이라 했으나 또 화재가 생겨1912년에 화암(禾岩)으로 다시 고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항간에서는이 바위를 ‘수바위(穗岩)’로 부르게 되었는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수(穗)자는 좀 어려운 한자여서 아는 사람이 적고 바위경치가 아름답다해서 수바위(秀岩)라고 세속에서 쓰기도 한다.
수바위는 예나 지금이나 벼(禾)에 얽히 이야기가 많다. 화암사에서약 300m 떨어진 곳에 계란 모양으로 우뚝 솟아 있어 초행길에도 찾기쉬운 목표물이기도 하다.
바위위에 왕관모양의 바위가 또 하나 있는가하면 직경 1m 주위 5m가량되는 웅덩이가 항상 물이 고여 있고 가뭄이심할때 이물을 주위에 뿌리며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왔고 옛날에는스님들의 수도장으로 사용했다 한다.
글자료 ; 일부 화암사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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