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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과거로의여행

[스크랩] 6.25가 뺏어간 엄마의 한..

by 풍뢰(류재열) 2007. 7. 15.

 

 

 

6.25가 일어난지도 벌써 57년이 지나갔다.

난 직접 전쟁을 체험한 세대는 아니지만, 학교 다닐때 이 맘때쯤이면 으레껏 6.25에 대한 포스터와 글짓기대회가 정기적으로 있었다.

물론 곳곳에 전쟁의 상처가 남아 있어서 기차역 광장에는 상이군인아저씨가 왜 그리도 많았는지.

 

6.25 전쟁이 끝난후에 태어 나서, 전쟁의 끔찍함은 모르지만 늘, 이 맘때쯤이면 난 일찍 돌아가신 엄마가 그립습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렸을때, 내 고향 안동 낙동강전투가 치열하였답니다.

마지막 남한 정부를 지키기 위해 낙동강을 지키기 위해 많은 젊은이들의 피가 낙동강을 붉은 피로 물들었다고 들었고, 여기 저기 시체 썩은 냄새가 조그마한 소도시는 검은 그림자로 뒤 덮었답니다.

 

전쟁과 나의 엄마..

저의 엄마는 결혼후 몇년간 자식이 잉태되지 않아 외할머니의 애간장을 태우다가, 29에 오빠를 낳으시고, 그 이듬해에 둘찌오빠를 낳으셨답니다.

외가집은 아들이 없는 딸만 셋있는 집이였기에, 맏딸이 낳은 두 손주를 끔찍이도 이뻐하셔서 피난도 가지않고 외가집에서 지내고 있었답니다.

설마했던 전투는 점점 남으로 이어지자, 외할아버지께서 손주 두놈을 죽일수 없다며, 산후 조리도 끝나지 않은 몸으로  태어난지 3개월 된 작은 오빠를 업고 부산으로 가는 열차를 타셨답니다.

기차가 막 출발하자 말자 엄마쪽으로 총알이 날아왔는데, 엄마의 머리를 스치고 업고있던 둘째오빠의 작은 머리에 박히고 말았답니다.

태어난지 3개월 된 아기.

무슨 죄가 있어서 전쟁때문에 죽어야만 했는지..

그 후 엄마는 늘 우울했습니다.

죽을때 입었던 둘째오빠가 입었던 옷을 무슨 보물단지처럼 가끔씩 꺼내보며 늘 한숨을 짓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천둥치는 날이면 미친듯이 울부짖던 모습..

왜 그래야만 하는지 그때는 너무 어려서 몰랐습니다.

그렇게 죽은 자식을 그리다가 저의 엄마는

둘째 오빠의 마지막입은 옷을 보물처럼 간직하고 사셨습니다.

죽은 둘째아들이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남은 자식 올망 졸망한 6남매를 버리고 50이 갓 넘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렇게 전쟁터에서 잃은 둘째오빠의 모습을 죽을때까지 마음에 품고요.

 

저도 6.25를 직접 겪지 않았기에 전쟁의 끔찍함은 모르지만, 엄마는 산이나 강쪽으로 나가지 못하게 주의를 주셨습니다.

전쟁이 남긴 상처의 흔적인 파편이 여기 저기 남아있기에, 행여 자식을 잃을까 마음 졸이며 야단 한번 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은 6.25전쟁이 일어난지 57년째 되는 날입니다.

아직도 전쟁때문에 가족과 생이별하고 전쟁이 남은 상처를 안고 사는 우리 부모님세대입니다.

전쟁은 끝났다지만, 아직도 우리나라는 휴전상태로 살고있습니다.

그리워도, 보고파도 만나지 못하는 이산가족들.

요즘, 20대는 6.25란 낱말조차도 모른답니다.

아직도 전쟁의 상처는 가슴에 안고 사시는 분들이 많은데도요..

저도 6.25전쟁을 실감하지 못하지만, 전쟁터에서 자식 잃은 울엄마의 고통이 아직도 내 마음에 남아있어, 6월이 오면 엄마가 그립습니다..

 

 

 

     

      전우야 잘 자라 / 현인

     

 

출처 : 오드리햅번
글쓴이 : 오드리헵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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