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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여행

[스크랩] [아름다운 우리 바다, 우리 섬 기행 ③] 소돌 해변의 갈매기들

by 풍뢰(류재열) 2007. 6. 30.

 

   혼자 여행 다니는 내게 적지 않은 사람들은 외롭지 않느냐는 질문을 먼저 해온다. 외롭지 않느냐. 나 스스로에게도 쉼 없이 던졌던 물음이기도 하다. 여행이라는 것 특히 혼자 떠난다는 것의 고통을 나는 일찍 알아버렸다. 그래서 긴 여행을 앞두고 가장 두려웠던 것은 다름 아닌 외로움이었다. 풍경소리 가득한 산사의 새벽이나 눈 덮인 해변을 걸을 때도 나는 늘 혼자였고 그 무렵 외로움이란 어쩌면 홀로 길 위에 서는 여행자에게는 천형(天刑)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외로움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 느낀 건 고통이 아닌 다른 것이었고, 그 허허로운 불치병(不治病)을 업보(業報)처럼 가슴에 담고 사는 사람들은 나처럼 다시 길을 떠날 것을 알게 되었다.


   주문진 바다로의 짧은 여행을 제안했을 때 S 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제나 혼자였던 나의 여행 습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였다. 이번 여행에 동행으로 S를 선택한 것은 그가 강릉, 속초 일대의 해안가를 워낙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의 얼굴에 깊이 드리워지는 삶의 그늘을 바다를 보며 씻어주고 싶었던 까닭이다. 물론 말수 적은 그의 성격도 선택에 도움을 주긴 했지만.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언제?’ 라는 한마디로 내 제안에 응했던 것이다.

   주문진까지 두 시간 여를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두 번의 휴식과 대관령에서의 짙은 안개비 때문에 네 시간이나 걸려 도착한 주문진에서 그가 나를 처음으로 데려간 곳은 주문진항의 맞은편에 있는 허름한 식당이었다. 월성식당. 빛바랜 슬레이트지붕에, 줄 지어 선 건물들이 한결같이 낮은 지붕들이어서 이 곳이 바람 많은 바닷가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원조 장치찜’ 이란 간판을 보자 그가 몇 번이나 말했던 식당이라는 기억이 떠올랐다.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자 ‘어서오세요’ 라는 인사대신 ‘몇 분이세요?’ 라는 질문이 먼저 나온다. 시간은 점심시간을 훌쩍 지나 오후 2시가 가까워오는데 네 명이 앉을 수 있는 여덟 개의 테이블은 거의 차있다. 물수건과 물을 가져다주면서도 뭘 드시겠냐는 질문은 던지지 않는다. 아마 이 시간대에는 한 가지 주문만 받는 모양이다.

동해안 일대에서만 잡히는 바다메기과 생선인 ‘장치’는 몸길이가 40~50 Cm 로 길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살이 물렁해서 며칠동안 말렸다가 큼지막하게 썰어 고추장과 들기름에 볶아낸 것이 장치찜이다. 흔히 찜요리로 유명한 아귀찜 보다는 훨씬 부드럽고, 콩나물대신 들어간, 양념이 푹 밴 강원도 감자는 또 다른 별미다. 서울에서는 맛 볼 수 없는 이유가 궁금했는데 어획량이 많지 않아 동해안 일대에서만 소비된다는 주인아주머니의 말을 듣자 그제야 고개가 끄덕여졌다. 생선살과 감자는 그리 맵지 않았으나 국물까지 손을 대자 급기야 땀범벅이 되고 말았다.

 

   비 그친 주문진 항은 한산했다. 유난히 긴 방파제 끝엔 붉은 등대가 서 있고 항구는 말 잃은 사람처럼 움직임이 없었다. 정박해 있는 배들을 향해 셔터를 눌러댔다. 생각해보면 나는 배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노을을 등지고 항구로 돌아오는 모습, 어구를 정리하는 어부의 모습, 집어등을 켠 모습, 갯벌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모습, 바다에 부딪혀 반짝이는 햇살을 뒤로하고 한가로이 바다에 떠 있는 모습들이 때론 내 모습 같아 사진첩 어딘가에 정리되어 있었다. 언젠가 정박해 있는 배의 색상이 파스텔 톤이 강한 것을 알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하긴 선박처럼 삶의 응어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피사체도 드물지 않을까. 배 위에선 오로지 육체노동만이 필요하다. 그래서 바다위에 배를 띄운다는 것은 삶을 향해 직선적이며, 더할 나위 없이 인간적이다.

   ‘역시 동해는 무섭지?’ 방파제의 중간쯤까지 걸었을 때 S가 물어왔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사실 서해나 남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이 바다는 거칠다. 그리고

그는 다시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렇게 바다를 보고 있으면 가끔 뛰어들고 싶어’

   수년전 S 를 처음 봤을 때 그는 한없이 사람 좋은 인상을 풍기며 매사 웃음으로 일관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큰 고민이 없어 보이는 사람, 늘 풍족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

그를 본 첫 인상이 그랬다. 하지만 그는 가슴 속 생채기를 드러내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그의 상처를 이해한다는 뜻이다. 그 상처까지 보듬어 줄 수 있으면 더욱 좋겠지만 때론 타인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가  세상을 향해 이해할 수 없는 일탈을 감행했을 때도 나는 묵묵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주문진에서 가까운 소돌 해변으로 이동하며 Eva Cassidy 의 음악이 듣고 싶어졌다. 이 음반은 우연한 기회에 선물 받은 것인데 내 취향과 잘 맞아 여행 중엔 늘 함께 하고 있다. 1963년 미국 태생인 그녀는 조그만 재즈 바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무명가수였다. 앨범은 워싱턴에서만 발매될 정도였다. 천상의 목소리라는 찬사를 받으며 그녀가 대중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암과 싸우다 서른 세 살의 나이로 생을 달리한 1996 년 이후였다. 무지개 저 너머 어딘가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지고 사랑과 기쁨만 가득한 이상적인 세계가 있을 거라는 ‘Somewhere over the Rainbow’ 는 이미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던 곡이었지만 마치 그녀의 운명을 예감하기라도 한 것 같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오고 ‘Imagine’ 이나 ‘What a Wonderful World’ 라는 곡도 좋아하는데, 특히 ‘What a Wonderful World’ 는 가족과 친지를 불러놓고 가진 마지막 공연에서 그녀가 부른 곡이었다. 죽음을 앞에 두고 암과 싸우며 부른 곡이 이렇게 아름답게 가슴을 울릴 수도 있다는 것에 나는 적지 않게 놀랐었다. 길지 않은 삶이었지만 행복했을 거라는 느낌이 드는 것은 그런 이유였다. Eva Cassidy, 그녀를 보며 다시 한번 느끼는 것. ‘삶은 고통 속에서 빛나는 것이다.’

 

   소돌 해변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주문진에 있는 해변 중에 조용한 해변을 선택한 것뿐이었다. 동해바다일 것. 한적할 것. 이 곳을 선택한 이유는 이 두 가지 밖에 없었다. 건드리기만 하면 가슴으로 눈물을 흘릴 것 같은 한 사내가 그의 격정을 토해내기에 는 좋은 장소였다.

예상대로 소돌 해변은 조용했다. 1 Km 나 되는 백사장과 마을 전체가 소가 누워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소돌(牛岩)이란 이름이 괜스레 마음을 편하게 했다. 백사장에 서서 바라보는 바다는 방파제에서 바라보는 그것과는 또 다른데 가 있다. 눈높이를 맞추고 바라보는 사물에는 낭만이 개입될 여지가 줄어들기 마련이다. 그만큼 현실적이 된다. 습관적으로 카메라에 손이 갔다. 포말을 일으키며 스러지는 파도와 백사장에 찍힌 갈매기 발자국이 제법 그럴듯해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다. 백사장에 내려앉은 갈매기들의 일부는 웅크리고 앉아 졸거나 모래속의 작은 벌래들을 잡고 있는데 나머지 갈매기들은 꼼짝하지 않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그것도 먼 바다를. 그들도 외로운 것일까. “존재의 본질은 불만(不滿)” 이라고 말했던 사람은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 였다. 불만. 어떤 것으로도 가슴을 채울 수 없는 무엇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텅 빈 백사장엔 갈매기 떼와 나 그리고 S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간간히 나타나던 따사로운 오후의 햇살이 구름에 가려지는 순간 말없이 바다만 바라보던 그의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참아왔던 눈물. 나는 보지 못한 척 외면했다.

인생이란 건 무언가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고통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 그것이 인생이다. Eva Cassidy 가 그랬던 것처럼. 아는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외로우리니. 그러니 울지 마라. 외로워 마라.


   발밑까지 다다른 파도는 힘없이 부서지고, 바람은 패잔병의 백기(白旗)처럼 내 옷깃을 흔드는데, 한 남자의 흐느낌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돌 해변의 갈매기 떼는 아직도 무심히 바다만 바라보고 있다.



2006. 4

 

 


출처 : 우인...세상의 끝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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