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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시

[스크랩] 『비단길·1』- 강연호

by 풍뢰(류재열) 2007. 6. 29.







      『비단길·1』 詩: 강연호 내 밀려서라도 가야 한다면 이름만이라도 아름다워야지 비단길 허나 지나는 마음 쓸쓸하여 영 자갈밭일 때 저기 길을 끌어가는 덤불숲 사이로 언뜻 몸 감추는 세월의 뒷모습 보인다 저렇게 언제나 몇 걸음 앞서 장난치며 어디 헛디뎌봐 헛디뎌봐 유혹하는 허방이여, 온다던 사람 끝내 오지 않아서 기어이 찾아나선 마음 성급하다 발 거는 걸까 잠시 허리 굽혀 신발끈이나 고쳐 매면 흐린 물둠벙에 고인 행색 더는 고쳐 맬 수 없는 생애가 엎드려 있다 앞서거나 뒤쳐지는 게 운명이라서 대상의 행렬은 뽀얀 먼지 속에서도 유유한데 비단길, 미끄러운 아름답게 나를 넘어뜨릴 때 어디 經을 외며 지나는 수도승이라도 있어 저런, 조심해야지, 일으켜주며 세상의 홍진 온전히 털어내는 법 가르쳐줄까 물음표처럼 휘어진 등뼈 곧추세울수록 먹장구름은 다시 우르르 몰려와 기우뚱거린다 지나가는 저 빗발 긋는 동안이라도 내 멈춰서지 못하는 건 영영 모래기둥으로 변할 몇천 년의 전설 두렵기 때문이 아니다 밀려서라도 가야 할 인연의 사슬 질기니 이름만이라도 아름다워야지 비단길 얽힌 마음 다잡아 걷다 보면 길 잘못 들었다며 앞을 가로막는 이정표조차 그렇게 정답고 눈물나는 것을 詩集 <비단길(1994년)> 中에서
    詩集 <비단길>은 강연호 시인의 첫 시집이다. 그가 시인으로서 이 세상으로 내는 자신의 첫 길에 '비단길'이라는 이름 을 내건 것은 의미심장하다. 잘 알려져 있듯이, 비단길은 타클라마칸 사막이 버티고 있는 내륙 아시아를 횡단하는 고대의 동서통상로인데, 그 명칭은 이 길을 통하여 서방으로 간 대표적인 상품이 중국의 비단이었던 데서 유래한다. 삭막하고 건조한 사막지역에 아주 간간이 깃든 오아시스 들을 연결하는 이 비단길을 타는 듯한 태양과 모래바람을 뚫고 대상(隊商) 들이 오고 갔다. 따라서 강연호 시인의 첫 시집 제목『비단길』에서, 그 길을 가는 시인 자신은 사막을 횡단하는 대상이며, 그가 품속에 지니고 있는 비단이란 곧 자신이 쓴 시(詩)를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 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연상 작용일 것이다. 그렇다. 『비단길』은 황폐한 시절을 거쳐 온 예민한 청춘이 시쓰기를 통하여 세상과 소통하려고 하는 가여운 그러나 소중한 길이다. 아무리 시인이 시쓰기를 통하여 지리멸렬한 일상을 탈출하려고 해도 그는 환멸만을 맛볼 뿐이다. 그가 꿈꾸는 세계는 현실 속에 세워지지 않는다. 이렇듯 어두운 세상과 병든 시대에 맞서는 방식으로 시인이 채택했던 비단길은, 즉 시쓰기는, 처음에는 '명도와 채도 가장 높게 빛났던' 길이 었지만, 지금은 '잘못 든 길'일 뿐이다. 시인은 시쓰기의 현실 속에서 백전백패한다. 비단길은 잘못 든 길이다. 그러나 시인은 잘못 든 길임을 알면서도 비단길을 계속 간다. 스스로를 위로하며 그는 간다. 그 비단길에서 그는 자주 미끄러져 넘어진다. 넘어진 그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는 스스로 다시 일어서야 한다. 수없이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그 과정에서 그는 문득 깨닫는다. 토란잎 그늘(현실세계) 속에 숨어서 흘린 그의 눈물(시)이 미끄러운 토란잎을 타고 방울되어 주르르 미끄러져 내리듯이 '생각하면 내 청춘도 그냥 미끄러진' 거였음을 깨닫는다. 이렇듯 청춘의 환멸과 좌절을 세상이 아니라 자신에게서 발견 하게 되자 비단길은 그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비단길은 이제 '지도를 만드는 길'이 된 것이다. 오랜 세월 헤매다녔어도 세상 어디에서도 '그대(이상세계)'가 보이지 않았던 것은 '그대 가린 건 바로 내 그림자였다'는 사실을 깨달을 정도로 시인은 이제 철이 들었다. '무모하게 빛났던 들끓음'으로 비단길을 나섰던 시인은 이제 '철든 짐승 처럼 터벅터벅 걸어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길을 너는 돌아와야 한다'고 말한다. '나'에서 '너'로의 이 극적인 시선의 변화가 암시해 주듯이, 이 돌아옴은 청춘의 새로운 성숙이다. 그리고 이 돌아옴이 의지하는 것은 최초의 출발점으로 이어지는 '기억'일 수밖에 없는데, 그 기억이 지도를 만드는 힘이 된다. 그러나 시인은 이제 막 돌아오는 길을 출발했을 뿐이며 아직 지도는 완성 되지 않았다. 지도가 완성되는 순간에야 우리는 그의 비단길이 정녕 잘못 든 길인지 아닌지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Kitaro/Caravansary



출처 : 여행, 바람처럼 흐르다
글쓴이 : isadora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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