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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과거로의여행

[스크랩] 60년대 청계천??

by 풍뢰(류재열) 2007. 8. 18.

 

 

60년대 청계천변, 그리고 우리들의 삶

헐벗고 가난한 마을, 아이들은 옷조차 제대로 챙겨입지 못하고 거처는 집이랄 것도 없는, 저곳이 거처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모습입니다.1968년의 청계천 모습 입니다. 먹을 것을 구했는지 우산을 쓴 아이들이 솥인지 양동이인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난민촌의 모습이 아니라 그리 오랜 옛날도 아닌 불과 37년전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37년전만 해도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누나 형들은 저렇게 살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불쌍하다', '비참하다'는 느낌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밝고 활기찬 기운이 느껴집니다. 저만의 엉뚱한 느낌일까요?  
1968년 서울 청계천변 사람들이 사는 모습입니다. '어딘지 모르게 밝고 활기찬 기운' 그 기운이 청계천을 복개하고 또 허물어 다시 물을 흐르게 하는 힘의 원천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전혀 엉뚱한 생각일까요?

청계천 복원공사의 완공이 일주일 남짓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청계천 완공을 기념해 '김영섭사진화랑'이 10월1일부터 20일까지 '청계천 사진전'을 연다고 합니다. 사진전에는 사진작가 '홍순태'님의 60년대 청계천 사진 30여장이 전시됩니다. 위 사진도 이 전시회에 나올 사진 중 한장입니다.

다음은 '김영섭사진화랑'이 전하는 '홍순태 사진'과 이번 사진전의 의미입니다.
홍순태는 30년 넘게 줄곧 사진계 제 1선에 서서 선도적 역할을 해온 사진가로 60년대 초 청계천이 복개되고 고가도로가 생기기 시작할 때까지 근 10 여 년 동안 과거 서민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청계천의 모습을 그들과 함께 하며 기록하였습니다.
홍순태가 보여주는 청계천 사진은 단순히 청계천의 옛 모습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청계천 주변 서민들의 애환과 그들 삶의 참모습이 담겨 있는 사진이며 개인의 작품일 뿐만 아니라 청계천 40년사와 같이 하는 역사의 기록물입니다.

  홍순태의 청계천 사진전은 비단 한 개인의 사진전을 넘어서 청계천의 역사와 같이 했던 한 사진가의 열정적이고 투철한 기록 정신에 의해 보존되어 온 청계천의 옛 모습과 현재 새롭게 복원된 청계천의 모습을 비교하며 청계천 복원의 의미를 되새기고 기념할 수 있는 전시가 될 것입니다.


다음은 이번 전시회에 전시될 사진 중 일부 입니다.
▼ 1968년 ▼

















▼ 1969년 ▼


청계천은 서울의 동맥 글 홍순태
그렇게나 말 많던 청계천 복원 공사가 마무리되어 10월 1일 준공을 앞두고 있다. 이 시점, 청계천 40년사에 맞추어 청계천을 주제로 한 사진전을 열게 되어 하늘을 날 듯한 기분이다.
60년대부터 찍기 시작한 청계천의 사진을 본 사람들은 ‘더럽고 추하고 가난한 모습을 찍어서 무엇에 쓰느냐’고 말하곤 했다. 아름다운 풍경사진을 동경하던 시대, 사진가들의 핀잔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랑곳 하지 않고 그 ‘보잘 것 없고 쓸데없는 사진’들을 묵묵히 찍었고, 그 필름들은 연구실에 차곡차곡 쌓여 갔다. 언제 발표되리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은 채...

우리시대 삶의 모습을 기록한다는 것은 사진가의 사명이다. 개천주변은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터전이다. 일제 강점기에도 그러했고 8.15 해방 후에도 그러했다. 6.25사변 직후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모여들어 청계천은 더욱 가난한 서민들의 생활터전으로 자리 잡아갔다.

하지만 청계천은 삶의 터전으로 그리 적합한 환경은 아니었다. 특히 가내공업이 성행하면서 세탁소, 염색공장 등 청계천을 오염시키는 요인은 늘어만 갔고, 움막집, 판잣집들이 즐비한 주택 환경은 시멘트 블록 집으로 개선되기도 했지만 위험스럽게 3층, 4층으로 높아져 갔다. 이러한 청계천에서 나는 60년대 초부터 청계천이 복개되고 고가도로가 완공 될 때까지 10여년을 청계천과 함께했다.
나는 청계천 주변 서민들의 애환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으며 아름다운 모습보다는 삶의 참모습을 찍고 싶었다. 처음에는 거부 반응도 많았으나 그들과 공감하여 가는 과정에서 그들은 서서히 자신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고 나는 그 속에서 감정의 리얼리티를 끄집어내고자 노력했다.

좋은 사진은 결코 사진가 자신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피사체가 되는 그 인물의 환경을 이해하고 그 인물과의 감정적 유대가 경의 없는 교감으로 이루어질 때 비로소 심층적 리얼리즘의 사진이 만들어짐을 당시 나는 이미 느끼기 시작하였으며 철저하게 실천에 옮겨 그들과 호흡을 같이 하며 우선 그들과의 거리감을 없애고자 노력했다.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서도 담배를 항상 휴대하여 그들에게 권하고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고 어린이들에게는 사탕과 과자를 주며 좋은 친구가 되 주려 노력했다.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는 나에게 그들은 묻곤 했다.
도대체 왜 이런 모습을 찍으려 하냐고. ‘이렇게 힘들게 사는 모습을 찍어 후세의 젊은 세대들에게 선조들은 이렇게 어렵게 살며 노력했다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항상 나의 입에서 나온 대답이었다.

이 작업을 시작하면서 거창한 목적이라던가, 욕심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내가 살던 시대에 함께 살다간 이러한 서글픈 사연들도 있었음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의무감으로 기록했을 뿐이다. 이명박 시장의 추진력 넘치는 청계천 복원사업 덕분에 영원히 묻혀버리게 되는 줄로 여겼던 나의 청계천 사진들이 햇빛을 다시 보게 되었다. 이 자리를 빌어 그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공해와 복잡함으로 서울 오염의 원천이었던 청계천이 다시 되살아나는 것은 막혔던 혈관이 뚫리는 것 같은 시원함을 느끼게 해주는 크나큰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청계천의 주변 환경이 완전히 정리되고 맑은 물이 흘러 물고기들이 유영하게 되는 날, 서울 시민들 모두 나와, 예전부터 서민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청계천에서 이 기쁨을 같이 나눌 수 있었으면 한다.
하지만 아울러 청계천이 복개될 당시 청계천 주변에 있던 보금자리를 빼앗기고, 성남, 경기도 광주 등의 대도시로 이주되는 슬픔을 겪었던 난민들의 아픔 또한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는 당시 이들의 아픔과 슬픔을 같이 하며 그들의 모습을 소중히 카메라에 담았고 이제는 사진으로만 남은 그때 그 사람들의 후손이 맑은 청계천과 함께 잘 살아가기를 간원할 뿐이다.
                   << 출처 : 도깨비뉴스 >>

출처 : 양지방이올
글쓴이 : 에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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