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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아름다운 우리 바다, 우리 섬 기행 ⑪] 아름답지만 왠지 처연한 것 - 강화도

by 풍뢰(류재열) 2007. 6. 30.
 

   포근한 겨울이다. 달리는 차 속으로 쏟아지는 햇살을 이불삼아 덮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늑한 한 낮이다. 버드나무 아래 차를 세우고 누우면 간혹 잎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이 얼굴을 간질이고, 그 햇살만큼이나 부드러운 바람이 한가하게 귓불을 스치고 지나갈 것 같은 2월이다.

하지만 이젠 피부로 느낄 수 있을 정도가 되어버린 지구온난화 때문에 이 포근함이 즐거울 수만은 없다. 우리 땅의 아름다움을 찾아 나선 나는 개발보다는 환경보존으로 기운 사시적(斜視的) 시각을 가진 탓에, 세상을 걷다 만나게 되는 개발의 흔적들이 때론 내 몸의 생채기인양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특히 새만금 방조제와 순천만을 다녀온 후로 갯벌 생태와 보존에 관심을 갖다가 알게 된 것이 바로 강화도였다. 우리나라 각 시대의 역사가 곳곳에 새겨져 있어 '살아있는 역사교과서' 라고 불리는 강화도에 세계 4 대 갯벌 중에 하나라는 동막갯벌(강화갯벌)이 있다는 것은 강화도의 또 다른 발견이었다. 동막갯벌과 함께 방문할 곳의 정보를 얻기 위해 강화도 지도를 보다가 가슴이 뭉클해져왔다. 지도에서 보이는 강화도는 단군성조의 개국과 함께 역사를 시작하여 국가의 치욕을 함께 지켜봐왔던 숙명의 섬이라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강화도에 가면서 고려와 조선의 왕들에게 이 땅에 살고 있는 자로서의 예를 먼저 갖추고 싶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방문할 곳으로 외세의 침략에 항전했던 궁궐터를 어렵지 않게 결정할 수 있었다. 고려궁지(高麗宮址)가 바로 그 곳이다.


 

 ▲  고려궁지내에 있는 '외규장각' 의 모습

 

   고려궁지의 입구인 승평문(昇平門)을 들어서자 4월에나 어울릴 것 같은 따뜻한 햇살이 온 궁궐터를 덮고 있었다. 이 곳이 바로 고려 23대 고종이후 39년간(1232~1270) 이나 몽고에 항전하다 끝내는 몽고군에 의해 유린당한 곳이다. 궁궐은 몽고와의 화친에 따라 허물었으며, 그 후 병자호란과 병인양요로 인해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된 굴욕의 현장인 것이다.

조선시대에 세운 ‘강화유수부동헌’을 지나 넓은 잔디밭 위에 선 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번듯한 팔작지붕과 깨끗한 단청을 보면 어디에도 비운(悲運)이란 단어가 어울릴 구석이 없어 보이다가도 ‘외규장각(外奎章閣)’ 이란 이름 속에는 이미 ‘슬픈 운명’ 을 품고 있는 듯하다. 외규장각은 조선 정조 때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설립한 도서관이었다. 왕립 도서관인 규장각(奎章閣)의 부속 도서관으로 약 1,000 여권의 왕실이나 국가 주요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서적을 보관하였으나 1866년 프랑스군에 의해 약탈당하고 일부는 건물과 함께 불에 타 없어졌다. 이 때 약탈한 279권의 외규장각 도서는 우리 정부의 반환 요청에도 불구하고 현재 프랑스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으니 ‘비운의 외규장각’ 이라 말하기에 앞서 이 땅에 사는 후손으로서 한없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인 채 햇빛 쏟아지는 잔디밭 위를 한참을 서성이다 돌아섰다.


   돌로 괴어 만든 무덤이라는 뜻의 순수 우리말인 고인돌(支石墓)은 한반도에 1만 5천여기가 산재해 있는데 이중 강화도에만 150여 기가 홀로 또는 무리지어 산재해 있다. 이 중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남한 최대의 북방식 고인돌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서둘러 길을 잡았다. 덮개돌만 8,000 Kg 나 되는 이 고인돌이 다른 소규모의 고인돌 군과 떨어져 단독으로 배치되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이는 고인돌이 단순히 분묘로서의 성격뿐만이 아니라 축조를 통해 집단간의 관계와 정체성 확립의 수단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넓은 벌판 위에 홀로 서 있는 고인돌을 보니 시간을 초월해 당시 청동기인들의 피와 땀이 느껴져 마치 그들 사회 속에 들어와 있는 착각마저 들게 된다.

 

 

 ▲  남한 최대 규모의 강화 지석묘

 

    차는 다시 강화도의 동쪽 해안도로를 달리고 있다. 강화도는 고려시대에 39년간의 수도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프랑스 군함사건, 미국 군함사건, 일본 군함사건 등을 겪으며 조선의 최후를 촉발시킨 도화선이 되었던 까닭에 강화도의 수비를 위해 5진(鎭) 7보(堡) 53돈대(墩臺)를 모든 강화도의 해변 지역에 두었는데 지도만 보아도 당시의 사투가 느껴져 눈물겨웠던 바로 그 요새들인 것이다. 그 중에 강화해협을 지키며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광성보, 덕진진 그리고 초지진을 들러보기로 했다.

 

 

 ▲ 광성보에 속한 용두돈대의 모습

 

광성보(廣城堡)는 조선 효종 때 설치된 요새로 안해루(按海樓)라는 현판이 걸린 성문 옆에 당시에 사용하던 대포가 놓여진 광성돈대와 강화해협에 용머리처럼 나와 있는 천연요새인 용두돈대, 광성포대 그리고 손돌목돈대 등이 주위에 배치되어 있다. 1871년에 있었던 신미양요 때 48시간에 걸친 가장 격렬했던 격전지로서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대부분의 조선군이 열세한 무기로 분전하다 장렬히 전사한 곳이다. 당시의 처참했던, 몇 장의 흑백 사진 앞에서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어장군 형제의 충절을 기리는 쌍충비각(雙忠碑閣)과 무명용사들의 무덤 앞에서 묵념을 하고 돌아섰다.


 

 ▲ 손돌목돈대의 모습.

 

덕진진(德津鎭) 역시 1871년의 신미양요 때 미국 해병대에 의해 점령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당시 파괴된 문루(門樓)와 덕진돈대, 남장포대 등은 후에 보수, 개축하였으며, 대원군의 명에 의해 건립된 쇄국 경고비만 탄흔을 안고 강화해협을 내려보며 서 있다.

초지진(草芝鎭)은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 그리고 1875년 운양호 사건의 격전지로서 당시 프랑스, 미국, 일본의 우수한 근대식 무기에 비해 짧은 사거리와 조준조차 되지 않는 열세한 무기로 사투를 벌였던 곳이다. 특히 운양호의 침공으로 인해 우리나라의 주권을 상실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니 비탄 속에 눈을 감았을 선조들의 우국충절(憂國忠節)에 새삼 고개가 숙여진다. 성벽과 노송(老松)에 남겨진 포탄의 흔적으로 당시의 치열한 전황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름을 잃지 않고 서있는 두 그루의 노송이 마치 어떤 시련에도 굴하지 않는 우리 민족의 기개(氣槪)처럼 느껴져 코끝을 시큰하게 만들고 있다.

외세의 침략과 굴욕을 당하지 않았던 나라가 어디 있겠는가. 방화와 약탈, 침공과 비탄으로 얼룩졌던 강화도의 격전지를 돌아보니 그 고통의 세월을 견디며 지금이 있게 해준 선조들에게 무한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 남장포대와 언덕위에 덕진돈대. 멀리 초지대교의 모습이 보인다.

 

 

 ▲ 초지진의 입구 모습

 

   시간은 어김없이 해를 서쪽 하늘로 밀어 놓았다. 서둘러 강화도의 남쪽 해안으로 차를 몰았다. 장흥리를 지나자 차창 밖으로 검은 갯벌이 그 속살을 드러낸다. 캐나다와 미국 동부 해안, 북해 연안, 아마존 강과 함께 세계 4대 갯벌 중의 하나라는 동막갯벌(강화갯벌)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갯벌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으로 강화도 본 섬의 유일한 해수욕장인 동막해수욕장 옆에 있는 분오리돈대(分五里墩臺)에 올랐다. 아!..... 1천8백만 평. 직선거리 4㎞의 갯벌이 한 눈에 다 들어오지도 못하고 눈앞에 펼쳐진다. 탄성과 함께 나는 고맙다고 중얼거렸다. 서울과 가까운 곳에 이런 광활한 갯벌이 있다는 것 자체가 고맙고 고마울 뿐이다. 해는 검은 갯벌 위를 붉은 빛으로 덮는다. 그 빛을 갯벌 속으로 가두었다가 다시 쓰려는지 반짝이며 빛을 반사하고 있다. 나이 스물을 막 넘긴 처녀의 피부처럼 갯벌은 곱다. 이 갯벌 때문에 어, 패류가 살고, 오염물질을 정화하고, 홍수와 태풍을 조절하고, 자연재해와 기후까지 조절하게 되니 어찌 고맙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 수 있을까. 쌀농사를 지을 수 있는 논 보다 갯벌이 2배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고 하니 간척사업으로 바다를 메웠던 지난날의 과오를 이젠 깨달았으면 좋겠다.

이 갯벌은 또한 저어새의 서식지다. 저어새는 ‘깃대종’ (flagship species)의 하나로 깃대종이란 생태계의 여러 종(種) 가운데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인식하고 있는 종이다. 또 그 중요성으로 인해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생물 종을 일컫는다. 깃대종의 서식지를 보호함으로써 수많은 다른 생물들의 서식지를 지켜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 분오리돈대에서 바라본 강화갯벌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참성단이 있는 마니산을 오른쪽으로 두고 차는 다시 서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분오리돈대에서의 낙조도 장관일 테지만 강화도의 낙조 조망지 중에서 단 한 곳을 선택하라고 하면 주저 없이 장화리를 선택할 것이다. 강화에 오기 전 장화리의 글자가 궁금해 찾아보니 긴 장(長)에 꽃 화(花) 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설명. “긴 곶이 있어 ‘긴곶’으로 불리다가 장화리가 되었다.” 긴곶 그리고 장화. 한자의 뜻과 비슷한 글자를 찾아 만든 이름 같아 보이지만, ‘긴 곶 위에 붉은 해가 뿌려놓는 노을이 마치 줄지어 늘어선 꽃처럼 보여서 지은 이름’ 이라고 고집하고 싶다.


 

 ▲ 장화리 낙조 모습

 

   해의 붉은 기운이 차창 밖에서 넘실대고 있다. 나는 긴 한숨을 토해냈다. 누군가 내 긴 한숨을 봤다면 그도 긴 한숨을 토해내리라. 내 한숨을 다시 내가 마시고 토해낸다.

동막리에서 여차리로 가는 길은 눈부시다. 여차리에서 장화리로 가는 길은 황홀하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이별과 헤어지고 난 후의, 아름답지만 왠지 처연한 것. 그것이 바로 장화리의 낙조다.

 

 


2007. 2


출처 : 아름다운 우리 바다, 우리 섬 기행
글쓴이 : 우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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